한 판만 더 하기 전에 정했어야 할 말
PC방에서 헤드셋으로만 들릴 줄 알았던 알람이 울려, 친구들에게 귀가 시간을 들킨 썰
밤새도 괜찮다고 말해놓고 몰래 귀가 알람을 맞췄다. 게임 소리는 헤드셋으로 들렸지만, 내 휴대폰은 친구들까지 들으라고 출발 시간을 알렸다.
넨네 편집팀 ·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괜찮다는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두 모인 금요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PC방에 가자는 말이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가족과 나갈 일이 있었지만 분위기를 끊고 싶지 않았다. 몇 시까지 되냐는 질문에 나는 일단 괜찮다고 답했다. 누가 밤새자고 확정한 것도 아닌데 혼자 너무 진지하게 시간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한마디를 아낀 덕분에 뒤에 설명할 말이 훨씬 많아질 줄은 몰랐다.
자리를 잡고 음료를 주문했다. 친구가 오늘은 도중에 빠지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농담했다.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휴대폰은 책상 구석에 두고 모니터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다 잠깐 혼자 있을 때 귀가 준비 알람을 켰다. 울리면 적당히 상황을 보고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챙기면서도 지금 말해야 할 사정은 미뤄뒀다. 알람이 내 대신 결정을 해줄 것 같았다.
귀에는 PC에 꽂힌 헤드셋을 썼다. 게임 소리도 친구들 음성도 그 안으로 들어왔다. 휴대폰으로 들어오는 소리까지 그쪽일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생겼다. 기기는 따로 연결돼 있었는데 귀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상태만 기억했다. 오는 길에 휴대폰과 쓰던 무선 이어폰은 이미 케이스 안에 있었다. 알람을 시험했다면 금방 알 일이었지만 게임 초대가 뜨자 그대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시간이 천천히 갔다. 캐릭터를 고르고 연습하다가 친구의 실수에 함께 웃었다. 중간에 메뉴판도 봤다. 시계를 한번 확인했을 때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 뒤로는 어느 판에서 졌는지 이겼는지가 시간의 기준이 됐다. 잘하면 한 판 더 하고, 아쉽게 지면 만회하려고 한 판 더 했다.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다음 대기 시간에 말하자며 미뤘다.
헤드셋 밖에서 내 시간표가 공개됐다
한 판이 끝나고 다 같이 조용해진 사이 책상에서 멜로디가 났다. 나는 헤드셋을 반쯤 벗었다. 내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었고 알람 이름이 보였다. 옆자리 친구가 먼저 웃었다. “밤새도 된다며?” 나는 얼른 화면을 눌렀다. 우리 자리만 들었는지 뒤쪽 손님도 잠깐 고개를 들었다. 평소 소리가 많은 곳이어도 익숙하지 않은 알람은 따로 눈에 띄었다.
친구가 몇 시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일 아침 일정이 있어서 오늘은 일찍 가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말까지 붙였다가 스스로 멈췄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다. 친구들은 지금 가도 된다고 했다. 누군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보다 훨씬 단순했다. 혼자 키운 부담이 우스우면서도 민망했다.
문제는 방금 새 판을 시작하려던 참이라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 인원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친구 한 명이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볼까 물었고, 다른 친구는 인원이 적어도 되는 게임을 고르자고 했다. 내가 나가는 것 자체보다 그 결정을 늦게 알린 일이 더 불편을 만들었다. 함께 놀던 사람들이 내 귀가 알람에 맞춰 다음 계획을 다시 짜고 있었다. 그 장면이 웃음보다 오래 남았다.
나는 한 판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가 다시 계산했다. 이동 시간까지 보면 여유가 없었다. 억지로 남으면 다음날 가족과의 약속도 틀어질 수 있었다.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친구는 진작 말하지 그랬냐며 음료를 건넸다. 크게 혼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내 사정을 끝까지 어색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들키기 싫었던 건 집에 가는 시간이 아니라, 미리 말하지 못한 내 사정이었다.
소리의 연결과 약속의 연결을 따로 봤다
로그아웃하고 나올 때 휴대폰 알람이 왜 밖으로 났는지 확인했다. 헤드셋은 PC와 연결돼 있었고 휴대폰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그날은 귀에서 게임 소리가 나니 다른 소리도 내 안에 모여 있을 것처럼 생각했다. 음성 채팅과 알람을 같은 문제로 여긴 것도 실수였다. 장비를 쓰고 있다는 모습보다 어떤 기기에 연결됐는지가 먼저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중간에 나갈 거면서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했다. 한 친구가 다음에는 시간을 알려주면 그 안에 맞춰 놀면 된다고 답했다. 그 말이 가장 편했다. 다 같이 같은 시간까지 있어야만 즐거운 게 아니었다. 인원을 맞추거나 긴 판을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주면 됐다. 내 시간표를 숨기느라 오히려 함께할 시간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이어폰 알람도 따로 시험했다.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넨네의 신호가 어떻게 들리는지 직접 확인했다. PC 헤드셋을 쓰는 동안 휴대폰 신호를 받을 방법은 그 환경에서 다시 골라야 했다. 귀에 기기를 겹쳐 쓰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개인 알람을 해결한다고 친구들과 소통하기 불편해지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상황에 맞는 방식과 약속을 미리 말하는 일이 함께 필요했다.
알람 시각도 집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으로 두지 않았다. 판을 마무리하고 정산하고 이동하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 게임에는 내가 정한 분 단위에 바로 멈출 수 없는 구간이 많았다. 다음 판을 시작하지 않을 시점을 먼저 생각하니 준비 시간이 더 현실적이 됐다. 알람은 판단을 도와주는 신호일 뿐 내가 이미 시작한 경기를 대신 끝내주지는 않았다. 그 계산을 친구들과 함께 해두면 훨씬 편했다.
다음번에는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말했다
다시 모였을 때 나는 오늘 몇 시쯤 나가야 한다고 먼저 말했다. 친구는 그러면 초반에 같이 할 게임부터 하자고 했다. 아무도 분위기를 깼다고 하지 않았다. 시간 제한을 밝히는 순간 즐거움이 끝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계획이 조금 달라질 뿐이었다. 내가 없는 뒤에 할 게임도 미리 정해졌다. 잠깐 참여하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정이 됐다.
자리에 앉아 휴대폰과 PC의 소리를 각각 확인했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알람은 실제 출력을 시험한 방식으로만 준비했다. 기기 연결이 맞지 않는 상황이라면 굳이 이어폰 신호를 쓰지 않고 경기 사이에 시간을 보겠다고 정했다.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책상 위에 서로 다른 기기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 설정도 덜 헷갈렸다. 헤드셋을 썼다고 휴대폰까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나가기로 한 시간보다 앞선 대기 화면에서 이번 판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친구들도 알겠다고 했다. 마지막 판이라는 말이 재촉처럼 들리지 않았고 나는 시계를 몰래 보지 않았다. 아쉽게 끝나도 다시 시작하자고 우기지 않을 수 있었다. 남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던 마음 때문에 오히려 말을 미뤘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가 준비할 시간을 주는 편이 훨씬 덜 어색한 배려였다.
로그아웃할 때 친구가 다음 주에도 보자고 했다. 나는 가능한 날을 답했다. 먼저 나간 사람이 다음 모임에서 빠지는 일은 없었다. 내 사정을 말하면 관계가 조금 멀어질 것 같던 걱정은 대부분 내 안에 있었다. 그날은 알람 소리로 인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수고했다는 말과 아쉽다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찜찜한 해명 메시지를 쓰지 않아도 됐다.
잘 노는 데에도 끝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알람이 울린 날은 지금도 가끔 친구들 농담에 등장한다. 밤샐 준비는 했는데 귀가 알람도 준비했다는 이야기다. 나도 웃는다. 그 일을 완전히 잊은 척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요즘은 같은 농담 뒤에 실제 시간을 분명히 말한다. 예전 같으면 분위기에 맞춰 괜찮다고 답했을 순간에 오늘 가능한 범위를 덧붙인다. 한 문장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사람마다 다음 날의 일정과 체력이 달랐다. 그걸 일찍 말하면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을 찾기 쉬웠다. 오래 남는 사람이 더 친한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제한이 없는 척하다가 갑자기 나가는 것보다 처음부터 알고 노는 편이 편했다. 내 귀가 시간을 숨기지 않게 된 뒤로는 남이 먼저 나간다고 할 때도 덜 아쉽게 느껴졌다. 각자의 생활이 있는 채로 같이 노는 것이었다.
휴대폰 알람도 전보다 적게 쓴다. 꼭 필요할 때는 소리와 연결을 확인하고, 대화로 정리한 시간까지 알람 여러 개로 덮지 않는다. 처음에는 설정이 부족해서 생긴 일인 줄 알았지만 결국 말 한마디가 빠진 일이기도 했다. 도구를 챙기는 것과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일은 서로 대신할 수 없었다. 둘을 같이 해두면 작은 시간 신호 하나로도 충분했다.
지금도 재밌는 판이 끝나면 한 판 더 하고 싶다. 그 마음은 그대로다. 다만 내일의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도 같이 인정한다. 둘 중 하나를 몰래 숨길 필요가 없었다. 헤드셋을 벗고 친구에게 인사한 뒤 밖으로 나오면 밤공기가 서늘하다. 오늘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고 내일도 제시간에 나갈 수 있다. 그 정도면 나는 꽤 잘 놀고 돌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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