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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마련한 핑계가 필요 없어졌을 때

소개팅에서 분위기가 좋아질 때, 미리 맞춰둔 집에 갈 시간 알람이 울린 썰

혹시 대화가 어색할까 봐 한 시간 뒤 알람을 맞췄다. 정작 시간이 됐을 때는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휴대폰 화면에는 너무 솔직한 이름이 떠 있었다.

넨네 편집팀 ·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한 시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소개팅 약속이 잡힌 뒤 며칠 동안 같은 걱정을 했다. 사진도 소개도 괜찮았지만 둘이 마주 앉았을 때 할 말이 없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친한 친구에게 장소를 보여주고 옷도 물어봤다. 친구는 그냥 커피 마시고 오면 된다고 했다. 그 말대로 가볍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약속 당일에는 카페에서 나오는 장면부터 상상했다. 잘 안 맞으면 자연스럽게 끝낼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휴대폰에 한 시간 뒤 알람을 넣었다. 이름은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가기’라고 적었다. 실제로 급한 일은 없었다. 소리가 나면 다음 일정이 있는 척할 수 있겠다는 정도였다. 시간까지 확보해두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만나기 전인데, 나는 이미 잘 안 풀릴 경우의 대본부터 만든 셈이었다. 화면을 끄고 나서 그 이름을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카페 근처에는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길 건너 창문을 봤다. 먼저 들어가 있을지 조금 더 기다릴지 고민했다. 알람이 울려도 이어폰으로만 들릴 거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상대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음악을 멈췄고, 인사하러 가기 전에 이어폰을 케이스에 넣었다. 휴대폰은 테이블에 화면이 보이도록 내려놨다.

처음 몇 분은 예상대로 어색했다. 오는 길은 괜찮았는지, 오늘 바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나는 준비한 질문을 떠올리면서도 외운 티가 날까 봐 말을 바꿨다. 상대도 비슷하게 긴장한 것 같았다. 컵을 잡았다 놓는 동작이 몇 번 겹쳤다. 이대로 한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 어떡하나 싶었다. 테이블 위 휴대폰은 아직 나를 안심시키는 물건이었다.

알람이 필요 없어지는 데에는 삼십 분도 안 걸렸다

대화가 풀린 건 둘 다 같은 동네 빵집을 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였다. 자주 품절되는 빵 이름을 말하자 상대가 웃었다. 자기도 몇 번 허탕을 쳤다고 했다. 그다음부터는 질문을 고를 필요가 줄었다. 어느 길로 걸어가는지,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개받은 사람의 정보보다 지금 눈앞에서 웃는 얼굴이 더 궁금해졌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상대가 지난 여행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그때 테이블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났다. 화면에는 ‘집에 가기’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뒤집었다가, 그렇게 해도 소리는 안 멎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들었다. 몇 번 누르는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 숨기려던 동작이 오히려 더 또렷했다.

“가셔야 하는 시간인가 봐요.” 상대가 먼저 말했다. 붙잡으려는 말도 따지는 말도 아니었다. 내가 곤란해하지 않도록 길을 열어주는 말투였다. 그 친절 때문에 더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금은 가고 싶지 않은데 내가 미리 적어놓은 문장은 정반대를 말하고 있었다. 급한 일정이 있다고 답하면 가장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이 대화를 내 손으로 끝내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처음 만나는 자리라 어색할까 봐 시간을 정해뒀는데, 지금은 괜찮다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말을 마치고 나니 변명이 길어진 것 같았다. 상대는 잠깐 웃더니 자기도 처음에는 긴장했다고 했다. 다행히 분위기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방금 하던 여행 이야기는 끊겼고, 우리는 어디까지 말했는지 다시 찾았다. 괜찮다는 말과 별개로 내가 만든 빈틈은 분명히 있었다.

지금 더 듣고 싶은 마음보다, 한 시간 전 겁먹었던 내가 먼저 말해버렸다.

핑계를 준비한 마음까지 들킨 기분이었다

알람을 끈 뒤에도 휴대폰을 테이블에 다시 놓기 망설여졌다. 상대가 화면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계속 궁금했다. 그 이름은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표시가 아니었다. 내가 이 자리를 미리 평가하고, 안 좋으면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는 뜻처럼 보일 수 있었다. 누구나 처음 만나는 자리를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상대에게 갑자기 보여준 방식이 아쉬웠다.

상대는 이야기를 이어줬다. 길을 잃었던 곳에서 우연히 좋은 식당을 찾았다는 결말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들었지만 이전보다 반응을 더 크게 하려는 나를 느꼈다. 알람 이름과 다르게 지금은 즐겁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오히려 어색해질 것 같아 숨을 골랐다. 사과를 더 하는 대신 질문을 하나 했다. 그 식당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대화는 그 질문에서 다시 돌아왔다.

커피를 다 마신 뒤 상대가 조금 걸을지 물었다. 나는 좋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아직 환했다. 알람이 울린 시각보다 한 시간 가까이 더 지나 있었다. 처음 내가 정한 시간은 실제로 필요한 약속이 아니라 긴장을 줄이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그 장치가 사라진 뒤에야 만남을 편하게 느꼈다. 모든 상황에 미리 답을 정해두려고 할수록 지금의 마음을 놓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 친구에게 먼저 알람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한참 웃더니 그래서 다음에 또 만나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면서 나도 웃었다. 민망했던 장면만 보면 망친 것 같았지만 만남 전체는 그렇지 않았다. 상대는 그 한 장면으로 나를 끝내 판단하지 않았다. 그 여유가 고마웠다. 다음에는 내가 상대에게도 그런 여유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만남에는 나갈 이유를 미리 만들지 않았다

두 번째 약속을 잡을 때는 정말 가능한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저녁에 다른 일이 있다면 언제쯤 이동해야 하는지 말하면 됐다. 아무 일정도 없는 날에는 굳이 출발 알람을 만들지 않았다. 불편하면 적당한 때에 말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미리 핑계를 확보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던 마음도 첫 만남을 지나면서 조금 누그러졌다. 내 표정과 말로 시간을 전할 수도 있었다.

혼자 기다릴 때 필요한 시간 신호는 따로 챙겼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동안 넨네를 짧게 시험해보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들리는지 확인했다. 다만 상대를 만나면 이어폰을 빼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대화 중에도 이어폰을 계속 쓰는 게 두 사람에게 편한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조용한 알람을 마련했다고 모든 만남에서 착용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알람 이름도 다시 정리했다. 혼자 볼 때는 우스워서 붙인 문장이 잠금 화면에서는 그대로 보였다. 누가 보면 곤란한 이름이라면 소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을 알아보기 쉽게 적되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해석을 남기지 않는 표현을 골랐다. 그리고 오늘 필요 없는 알람은 켜두지 않았다. 상대에게 설명할 일을 줄이는 데에는 새로운 기능보다 이 작은 정리가 더 도움이 됐다.

두 번째로 만난 날에는 휴대폰을 가방에 뒀다. 다음 약속이 없어서 얼마나 머물지 급히 결정하지 않아도 됐다. 대화가 잠깐 끊겼을 때도 지난번처럼 실패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각자 물을 마시고 창밖을 보는 시간이 생겼을 뿐이었다. 상대가 새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침묵을 견디려고 만든 알람 없이도 침묵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지금의 마음은 지금 말하는 편이 나았다

어느 정도 편해진 뒤 상대가 그날 알람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소리보다 내가 휴대폰을 뒤집었다가 다시 든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면 오히려 더 들킨다는 걸 배웠다고 답했다. 둘 다 웃었다. 처음에는 지우고 싶은 장면이었는데 나중에는 긴장했던 마음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다음에는 준비를 다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그렇다고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반드시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나가야 할 시간도 있고 대화가 편하지 않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때에는 내 일정을 분명히 말하면 됐다. 알람이 대신 말하게 하면 의도하지 않은 뜻까지 따라올 수 있었다. 그날 내가 배운 것은 시간을 정하지 말라는 규칙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들일 방식까지 조금 생각해보자는 정도의 일이었다.

지금도 낯선 약속 전에는 긴장한다. 다만 나중에 쓸 핑계를 정하기 전에 어디서 만나고 얼마나 이동하는지부터 챙긴다. 시간이 중요하면 먼저 알리고, 개인적으로 확인할 일이 있으면 잠깐 양해를 구한다. 그 편이 숨겨둔 장치가 갑자기 울리는 것보다 편했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말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말하기 전에 혼자 만든 상황이 늘 더 복잡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케이스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음악이 들렸고 오늘 나눴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휴대폰에는 새 약속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나갈 시간을 숨겨놓는 대신 다시 만날 시간을 함께 정해둔 화면이었다. 그 차이가 좋았다. 한 시간 뒤 어떤 기분일지는 미리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지금 내 목소리로 말해두기로 했다.

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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